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문단 편집) === 제2차 브로디 전투[* 제1차 브로디 전투는 [[브로디 전투]] 참고] === 북쪽에서의 주공은 2군데에서 적을 돌파하여 브로디에서 적을 포위하는 것이 1차적 목표었다. 전선군 우익에서는 3군, 13군, 3근위군, 1근위전차군, 바라노프 기병-기계화 그룹이 [[루치크|루츠크]]-라바 루츠카야(Rava-Russkaya)[* 리보프에서 북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있다.] 축선을 따라 남서쪽으로 진격했고 좌익에서는 [[테르노필]]-[[르비우|리보프]]-[[https://en.wikipedia.org/wiki/Przemy%C5%9Bl|프셰미실]] 방면으로 제3근위전차군, 제4전차군, 제38군, 제60군과 소콜로프 기병-기계화 그룹이 진격했다. 7월 13일 공세가 시작됐고 우익에서 소련군은 12km의 전선에 적의 방어선을 돌파할 충격그룹인 14개 소총사단과 2개 기동군단, 2개 포병사단을 투입했다. 전선이 돌파되자 코네프는 16일부터 바라노프 기병-기계화그룹과 1근위전차군을 돌파구에 투입했다. 이곳을 담당한 것은 네링의 제4기갑군이었다. 네링은 예비인 16, 17기갑사단을 투입했다. 2개 기갑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은 43대뿐이었고 이들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소련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좌익에서도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여기서도 14km의 전선에 15개 소총사단, 2개 기동군단, 2개 포병사단으로 구성된 충격그룹을 투입했다. 이곳에서는 라우스의 제1기갑군이 북쪽에 비해 성공적으로 적을 막아섰다. C분견군단의 분전 속에 제38군과 60군 좀처럼 전선에 돌파구를 뚫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련군의 전력은 너무 막강했다. 제349보병사단과 제357보병사단은 와해되어버렸고 소련군은 14일에 1,000대가 넘는 전차와 자주포로 구성된 기동 그룹을 콜토프 회랑[* 너비 4km, 길이 18km정도의 좁은 지역이었다.]으로 투입했고 제1,8기갑사단이 어떻게든 막으려고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밀려나버렸다.[* 이 와중에 8기갑사단은 처음에 이상한 곳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제1기갑사단과 제14SS척탄병사단만으로 반격을 가해야 했다.] 15일에는 제20기갑척탄병사단이 투입됐으나 소용없었고 16일부터 제3근위군과 제4전차군이 아직 위험한 돌파구를 따라 후방으로 진격했으며 17일에는 3근위전차군도 이 통로를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17일이 되자 브로디 양 옆에서 독일군의 전선은 완전히 돌파당했으며 18일에 북동쪽에서 진격한 바라노프 기병-기계화 집단과 남동쪽에서 진격해온 3근위전차군이 브러디 서쪽에서 만나면서 브로디에는 13군단과 소련군을 간신히 막고 있던 제14SS척탄병사단 "갈리치아"를 포함한 8개 사단[* 제13군단의 361보병사단, 454보안사단과 C 분견군단의 183, 217, 339보병사단] 약 45,000명이 갇혀버렸다. 제24기갑군단과 제48기갑군단은 남쪽에서 소련군의 좁은 돌파구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련군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제48기갑군단은 돌파구를 막는데 실패하자 13군단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공세를 펼쳤으나 포위망이 너무 단단했고 결국 독일군은 제13군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은 제60군과 제38군에 의해 22일까지 포위망 내부의 저항은 분쇄됐다. 17,000명이 포로가 됐고 25,00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포위망 안의 적을 소탕하는 와중에도 소련군은 계속 서쪽으로 진격했다. 7월 23일, [[폴란드 지하국|폴란드 국내군]]은 리보프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같은날 바다노프 기병-기계화 그룹과 1근위전차군이 프셰미실[* 리보프에서 서쪽으로 100km정도 떨어져있다.]-리보프 도로를 차단하면서 리보프로 향하는 독일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제60군과 제3근위전차군이 리보프에 접근했고 제1근위전차군과 제13군, 바다노프 기병-기계화 그룹이 북서쪽의 비스와 강에 다다르자 독일군은 리보프를 포기했다. 13군단이 분쇄되면서 제4기갑군과 제1기갑군 사이에는 100km에 이르는 돌파구가 뚫려버렸고 남북으로 분단된 독일군은 이 틈새를 예비로 있던 제17군으로 막게 된다. 7월 27일 소련군은 프셰미실과 [[르비우|리보프]]를 탈환하고 공세를 마무리지었다. 이제 독일군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축출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